동해를 품에안은 빼어난 조각의 석 굴 암
August 12, 2015
#라이프프라자

부처님은 매우 다양한 손 모양을 하고 있고, 각각의 손 모양이 의미하는 것이 모두 다르다. 석굴암의 부처님도 손 모양은 ‘항마촉지인’이라고 한다. 이는 ‘악마를 항복시키는 손 모양’이라는 의미이다. 석가모니가 가부좌를 하고 오른손으로는 땅을 향해 있는 모양이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을 즈음에 악마들이 방해하러 나타났는데 석가모니가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켜 땅의 신이 나타나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증명해 주어 악마들은 석가모니에게 항복하였다 하여 이 모양을 따라 ‘항마촉지인’이라고 한다.

1. 석굴암의 특징
석굴암은 신라 때 오악의 하나인 토함산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 사찰로 1962년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으며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다.
석굴암은 751년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이 창건하기 시작해서 774년 혜공왕 때 완공하였는데 당시 명칭은 ‘석불사’라 불렀다 한다.
8세기 중엽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에 건립된 석굴암은 불교사상과 매우 발달한 수리적 원리를 바탕으로 한 고도의 건축 기술, 뛰어난 조형감각으로 완성되었다. 우리가 석굴암에서 느끼는 장엄미와 숭고미는 이러한 바탕과 그 속에 내재하는 조화율에 있을 것이다.
석굴암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가시적인 건축과 조각으로 재현한 것이며, 조각에 있어서도 인위적인 기교나 부자연스러움 없이 생명력이 넘치며 탁월한 예술성이 돋보인다.
석굴암은 1995년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공동 등재되었다.
조각에 있어서 원숙한 조법과 사실적인 표현에서 완벽에 가까운 석가여래상, 10구의 얼굴과 전신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인왕상의 용맹, 사천왕상의 위엄, 주실 내의 보살들의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 나한상들의 개성 있는 표현 등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의 최고의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주실 내에 봉안되어 있는 굽타 양식의 본존불 석가여래불은 고요하고 결가부좌한 모습, 가늘게 뜬 눈, 온화한 눈썹, 미간에 서려 있는 슬기로움, 금방이라도 말할 듯한 입과, 코, 길게 늘어진 귀 등 그 모든 것이 내면에 깊은 숭고한 마음을 간직하도록 조성된 것으로서 세계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미를 대표하고 있다.

2. 석굴암의 구조
석굴암의 석굴은 백색의 화강암재를 사용하여 토함산 중턱에 인공으로 석굴을 축조하고 그 내부 공간에는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벽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금강역사상, 천왕상 등 총 39체의 불상을 조각하였다. 석굴암의 석굴은 장방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데 360여 개의 판석으로 원형주실의 궁륭천장 등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다. 석굴암의 입구 쪽에 위치하고 있는 평면방형의 전실에는 좌우로 4구씩 8부 신상을 두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2구씩의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석굴암은 전실, 통로, 주실로 이루어졌는데 방형 공간인 전실에는 팔부중상과 금강역사상이 있고, 사천왕상이 있는 좁은 통로를 지나면 궁률(dome)천정으로 짜여진 원형공간의 주실이 나온다. 주실의 중앙에는 석가모니 대불이 있고,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범천상과 제석천상, 보현·문수보살상, 그리고 십대제자상이 대칭을 이루도록 조각되어 있다.
천체를 상징하는 둥근 공간에 이르면 한가운데에 높이 350cm의 당당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지닌 석가모니 대불이 동해를 향해 앉아 있다.
얼굴과 어깨를 드러낸 옷의 주름에 생동감이 있어 불상 전체에 생동감이 넘치며 깊은 명상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눈과 엷은 미소를 띤 붉은 입술, 풍만한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감실은 주실에서의 위치로 보아 지상계와 천상계의 중간을 뜻한다. 미륵보살상의 오른쪽 어깨, 손목, 오른쪽 무릎으로 이어지는 직삼각형이 안정감을 주는 반면 세운 무릎, 비스듬히 얹은 팔, 숙인 얼굴이 그리는 곡선은 변화와 운동감을 주고 있다.
전실 벽면에 있는 8구의 팔부중상은 무사의 성격을 띠고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여러 가지 모습의 신들이며, 치마를 입은 금강역사상 또한 불법을 수호하는 한 쌍의 수문장으로서 상체의 근육이 발달한 용맹스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 금강으로 만든 방망이를 들고 있다 하여 금강역사라 칭했다.
주실 뒷벽 가운데 있는 십일면관음보살상은 머리둘레에 열구의 얼굴이 화려하고 섬세하게 조각되어 눈길을 끄는데,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표정, 화려하게 전면을 장식한 영락 장식, 유려하게 흘러내린 천의, 손가락 발가락의 미묘한 움직임, 왼손은 한 송이 연꽃이 있는 병을 들고 오른손은 내려서 영락을 잡고 정면관의 자세로 서 있는 모습에서 화려함과 원숙함을 느끼게 한다.
채광은 어떻게 했을까요? 동짓날 일출 방향과 마주 보는 석굴암 본존불은 자연광을 끌어들이기 위한 광창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만약 광창이 없었다면 석굴암의 채광방법은 무엇이었을까?
당나라 현장의『대당서역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책엔 커다란 거울을 바닥에 놓고 빛을 끌어들인 인도석굴의 조명방식이 나타나 있는데 인도로 성지순례를 많이 갔던 당시, 석굴암도 잘 연마된 화강암을 석굴암 입구에 놓고 빛을 끌어들이는 간접조명을 택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3. 관리와 보존
1913년 일제는 대대적인 석굴암 수리 공사를 단행하는데 수리의 기본방침은 전부 해체하고 재조립한 뒤 콘크리트를 치는 것이었다. 콘크리트는 여름철 습기를 막지 못했고 급기야 석굴 조각 표면에 이끼까지 생겨 결국 1961년 누수를 막기 위해 기존 콘크리트 돔 위에 다시 2중 돔을 설치했다. 뿐만 아니라 습기를 막기 위한 목조건물까지 들어섰지만, 습기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결국 제습 기계 장치를 들여놓고 그것도 부족하여 밀폐를 위한 유리 벽을 설치했다. 유리 벽 너머로 석굴암을 봐야만 하는 지금의 현실이 안타깝다.
지금부터라도 보다 많은 문화재에 관심을 갖고 모두가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낀다면 현재보다 나은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Ⅰ글Ⅰ 공 일 영
■ 現 호치민시 한국국제학교
역사교사


동해를 품에안은 빼어난 조각의 석 굴 암
August 12, 2015
#라이프프라자
부처님은 매우 다양한 손 모양을 하고 있고, 각각의 손 모양이 의미하는 것이 모두 다르다. 석굴암의 부처님도 손 모양은 ‘항마촉지인’이라고 한다. 이는 ‘악마를 항복시키는 손 모양’이라는 의미이다. 석가모니가 가부좌를 하고 오른손으로는 땅을 향해 있는 모양이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을 즈음에 악마들이 방해하러 나타났는데 석가모니가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켜 땅의 신이 나타나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증명해 주어 악마들은 석가모니에게 항복하였다 하여 이 모양을 따라 ‘항마촉지인’이라고 한다.
1. 석굴암의 특징
석굴암은 신라 때 오악의 하나인 토함산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 사찰로 1962년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으며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다.
석굴암은 751년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이 창건하기 시작해서 774년 혜공왕 때 완공하였는데 당시 명칭은 ‘석불사’라 불렀다 한다.
8세기 중엽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에 건립된 석굴암은 불교사상과 매우 발달한 수리적 원리를 바탕으로 한 고도의 건축 기술, 뛰어난 조형감각으로 완성되었다. 우리가 석굴암에서 느끼는 장엄미와 숭고미는 이러한 바탕과 그 속에 내재하는 조화율에 있을 것이다.
석굴암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가시적인 건축과 조각으로 재현한 것이며, 조각에 있어서도 인위적인 기교나 부자연스러움 없이 생명력이 넘치며 탁월한 예술성이 돋보인다.
석굴암은 1995년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공동 등재되었다.
조각에 있어서 원숙한 조법과 사실적인 표현에서 완벽에 가까운 석가여래상, 10구의 얼굴과 전신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인왕상의 용맹, 사천왕상의 위엄, 주실 내의 보살들의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 나한상들의 개성 있는 표현 등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의 최고의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주실 내에 봉안되어 있는 굽타 양식의 본존불 석가여래불은 고요하고 결가부좌한 모습, 가늘게 뜬 눈, 온화한 눈썹, 미간에 서려 있는 슬기로움, 금방이라도 말할 듯한 입과, 코, 길게 늘어진 귀 등 그 모든 것이 내면에 깊은 숭고한 마음을 간직하도록 조성된 것으로서 세계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미를 대표하고 있다.
2. 석굴암의 구조
석굴암의 석굴은 백색의 화강암재를 사용하여 토함산 중턱에 인공으로 석굴을 축조하고 그 내부 공간에는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벽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금강역사상, 천왕상 등 총 39체의 불상을 조각하였다. 석굴암의 석굴은 장방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데 360여 개의 판석으로 원형주실의 궁륭천장 등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다. 석굴암의 입구 쪽에 위치하고 있는 평면방형의 전실에는 좌우로 4구씩 8부 신상을 두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2구씩의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석굴암은 전실, 통로, 주실로 이루어졌는데 방형 공간인 전실에는 팔부중상과 금강역사상이 있고, 사천왕상이 있는 좁은 통로를 지나면 궁률(dome)천정으로 짜여진 원형공간의 주실이 나온다. 주실의 중앙에는 석가모니 대불이 있고,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범천상과 제석천상, 보현·문수보살상, 그리고 십대제자상이 대칭을 이루도록 조각되어 있다.
천체를 상징하는 둥근 공간에 이르면 한가운데에 높이 350cm의 당당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지닌 석가모니 대불이 동해를 향해 앉아 있다.
얼굴과 어깨를 드러낸 옷의 주름에 생동감이 있어 불상 전체에 생동감이 넘치며 깊은 명상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눈과 엷은 미소를 띤 붉은 입술, 풍만한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감실은 주실에서의 위치로 보아 지상계와 천상계의 중간을 뜻한다. 미륵보살상의 오른쪽 어깨, 손목, 오른쪽 무릎으로 이어지는 직삼각형이 안정감을 주는 반면 세운 무릎, 비스듬히 얹은 팔, 숙인 얼굴이 그리는 곡선은 변화와 운동감을 주고 있다.
전실 벽면에 있는 8구의 팔부중상은 무사의 성격을 띠고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여러 가지 모습의 신들이며, 치마를 입은 금강역사상 또한 불법을 수호하는 한 쌍의 수문장으로서 상체의 근육이 발달한 용맹스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 금강으로 만든 방망이를 들고 있다 하여 금강역사라 칭했다.
주실 뒷벽 가운데 있는 십일면관음보살상은 머리둘레에 열구의 얼굴이 화려하고 섬세하게 조각되어 눈길을 끄는데,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표정, 화려하게 전면을 장식한 영락 장식, 유려하게 흘러내린 천의, 손가락 발가락의 미묘한 움직임, 왼손은 한 송이 연꽃이 있는 병을 들고 오른손은 내려서 영락을 잡고 정면관의 자세로 서 있는 모습에서 화려함과 원숙함을 느끼게 한다.
채광은 어떻게 했을까요? 동짓날 일출 방향과 마주 보는 석굴암 본존불은 자연광을 끌어들이기 위한 광창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만약 광창이 없었다면 석굴암의 채광방법은 무엇이었을까?
당나라 현장의『대당서역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책엔 커다란 거울을 바닥에 놓고 빛을 끌어들인 인도석굴의 조명방식이 나타나 있는데 인도로 성지순례를 많이 갔던 당시, 석굴암도 잘 연마된 화강암을 석굴암 입구에 놓고 빛을 끌어들이는 간접조명을 택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3. 관리와 보존
1913년 일제는 대대적인 석굴암 수리 공사를 단행하는데 수리의 기본방침은 전부 해체하고 재조립한 뒤 콘크리트를 치는 것이었다. 콘크리트는 여름철 습기를 막지 못했고 급기야 석굴 조각 표면에 이끼까지 생겨 결국 1961년 누수를 막기 위해 기존 콘크리트 돔 위에 다시 2중 돔을 설치했다. 뿐만 아니라 습기를 막기 위한 목조건물까지 들어섰지만, 습기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결국 제습 기계 장치를 들여놓고 그것도 부족하여 밀폐를 위한 유리 벽을 설치했다. 유리 벽 너머로 석굴암을 봐야만 하는 지금의 현실이 안타깝다.
지금부터라도 보다 많은 문화재에 관심을 갖고 모두가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낀다면 현재보다 나은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Ⅰ글Ⅰ 공 일 영
■ 現 호치민시 한국국제학교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