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어른 김수환 추기경 과 법정 스님

그리운 어른 김수환 추기경 과 법정 스님

1969년 3월 28일은 한국 가톨릭 역사상 뜻깊은 날이었다. 이날 로마 교황청은 김수환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AP통신 등 전 세계 주요 뉴스통신사들은 바티칸시티 발로 일제히 한국 최초의 추기경 탄생 소식을 타전했다. 서품식은 4월 28일 거행됐다.
한국은 드물게 평신도에 의해 자생적으로 가톨릭 포교가 이루어진 나라이다. 1784년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고 귀국, 이벽, 정약전 형제, 권일신 형제 등과 조선교회를 창립했다. 1845년 김대건이 상하이에서 사제서품을 받아 조선인 최초의 신부가 됐다. 이어 124년 만에 첫 추기경이 나온 것이다. 이어서 2006년 정진석 대주교가 두 번째 추기경, 2014년 염수정 대주교가 세 번째 추기경으로 각각 서임 됐다.
김 추기경은 단순히 가톨릭교회를 이끄는 종교 지도자를 넘어서 우리 사회 전체의 버팀목이 됐다. 어려운 시기 정신적 지도자였으며, 국가의 어른으로서,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안이 됐던 촛불과 같은 인물이었다.
또 다른 종교 지도자 법정 스님은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를 평생토록 보여준 인물이다. 김 추기경이 선종한 이듬해 입적한 법정 스님은 ‘무소유’를 화두로 비움과 자비행의 길을 걸었다. 욕심을 버리고 내면의 충만함을 추구하라는 법문은 불교 신자는 물론이거니와 일반인들에게도 큰 감동을 안겼다.
김 추기경은 1922년 대구에서 출생, 194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현 동성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일본 조치대학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태평양전쟁으로 1944년 귀국했다. 1951년 가톨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1964년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신학사회학을 연구했다. 1951년 사제 서품을 받고 대구대교구 안동 천주교회 주임신부가 됐으며, 1955년 대구대교구 김천시 황금동 천주교회 주임신부 겸 김천시 성의중고등학교장을 역임했다. 1964년 주간 가톨릭 시보 사장, 1966년 마산 교구장으로 임명되고 5월 29일 주교가 됐다.
1968년 제12대 서울 대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대주교가 됐고 1969년 추기경에 임명됐다. 1970년 이후 한국 주교회의 의장,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준비위원장, 교황청 세계주교회의(시노두스) 한국 대표를 지냈다.
김 추기경은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는 믿음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 아픔을 함께했다. 역사에 동참하는 교회 상을 추구해 과거 암울했던 군사독재 정권 시절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싸움의 편에 섰다. 김 추기경은 시국 관련 사건 때마다 영향을 미쳤고 교회 안팎에서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2009년 2월 16일 김 추기경이 선종했을 때 추모 열기는 놀랄 정도로 뜨거웠다. 빈소가 마련된 명동성당을 찾은 조문객은 40만 명에 육박했으며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추모 행렬이 수 ㎞에 달했다. 모두의 마음속에 김 추기경이 차지한 자리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김 추기경은 “세상에서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라는 말을 남겼다. 이것이 그의 유언이 됐다. 그는 세상을 떠나며 각막을 기증해 두 사람에게 빛을 주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법정 스님은 1932년 10월 8일 해남에서 태어났다. 1956년 전남대학교 상과대학 3학년을 수료하고 그해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같은 해 7월 사미계를 받고, 1959년 3월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이어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했다.
그 후 지리산 쌍계사,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 여러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했고, 불교신문 편집국장, 역경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1970년대 후반 송광사 뒷산에 작은 암자 불일암을 손수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6년 수필집 ‘무소유’를 낸 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1992년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산골 오두막에서 지냈다.
1994년부터 시민운동단체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끌었다. 그는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의 회주를 한동안 맡았을 뿐 그 흔한 사찰 주지 한번 지내지 않았다.
1996년 서울 도심의 대원각을 시주받아 이듬해 길상사로 고치고 회주로 있다가 2003년 12월 회주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직접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며 무소유의 삶을 살던 중 폐암이 생겨 투병하다가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78세(법랍 54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사리도 수습하지 말고, 탑도 세우지 말며, 평소 입은 승복 그대로 다비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대나무 평상에 누워 가사 한 장 덮고 가시는 법정 스님의 마지막 길을 많은 사람이 배웅했다.
법정 스님은 수필가로도 큰 사랑을 받았다. 담담하면서도 쉽게 읽히는 글쓰기로 여러 책을 출간했다. 수필집으로 ‘무소유,’ ‘오두막 편지,’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버리고 떠나기,’ ‘물소리 바람소리,’ ‘산방한담,’ ‘텅 빈 충만,’ ‘스승을 찾아서,’ ‘서 있는 사람들,’ ‘인도기행’ 등이 있다. 이중 ‘무소유’는 1976년 4월 출간된 이후 법정 스님이 입적한 2010년까지 34년간 약 180쇄를 찍은 대표적인 베스트셀러였다.
김 추기경과 법정 스님은 각각 가톨릭과 불교를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종교 화합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였다.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한국사회에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1997년 12월 14일 길상사 개원법회에 김 추기경이 참석해 축사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법정 스님은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발행하는 평화신문에 성탄메시지를 기고했다.
법정 스님은 성탄메시지에서 “예수님의 탄생은 한 생명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낡은 것으로부터 벗어남”이라며 “우리가 당면한 시련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낡은 껍질을 벗고 새롭게 움터야 한다”고 설파했고, 메시지 중간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마지막에 ‘아멘’이라고 적기도 했다.
법정 스님은 이듬해 2월 24일 명동성당에서 ‘나라와 겨레를 위한 종교인의 자세’라는 주제의 특별강연을 통해 ‘무소유’의 정신으로 당시의 IMF 경제난국을 극복하자고 호소했다.
법정 스님은 2000년 4월 28일 봉헌된 길상사 관음보살상의 제작을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 전 서울대 교수에게 맡겼다. 그래서인지 길상사 마당에 선 관음보살상은 성모마리아의 모습과 닮았다.
김 추기경은 2009년 2월 16일, 법정 스님은 2010년 3월 11일 1년 정도 시차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최근 각각 9주기와 8주기가 지났다.
이들 두 종교 지도자는 종교계를 뛰어넘어 사회 전반에 커다란 가르침을 안겨주었다. 상호 갈등과 대립 속에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힘든 요즘, 두 어른이 계셨으면 많은 국민이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마음속에 존경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을 갖고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두 어른이 남긴 사랑과 봉사, 무소유와 비움의 정신을 되새겨볼 때이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