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만 명 캄보디아 어린이 생명 구한 괴팍한 스위스인 의사, Dr. 비토첼로를 기억하며

지난 9월 9일(스위스 현지시각) 캄보디아 어린이 무료 병원을 수십년간 운영해온 스위스 출신 의사 비트 리쉬너(Dr. Beat Richner) 박사가 향년 7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소식을 접한 캄보디아 국민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사실을 슬퍼하고 그를 애도했다. 정부는 애도 기간을 당초 7일에서 100일로 늘려 전 국민이 그를 추모하도록 했다. 그가 원장으로 재직했던 프놈펜 칸타보파 어린이병원과 씨엠립 자야바르만 7세 어린이병원에 그의 빈소가 마련된 가운데, 한 달여가 다 된 지금까지도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열심히 후원금을 모은 캄보디아‘슈바이쳐’
캄보디아의 ‘슈바이처’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가 이 나라에서 이룬 업적은 위대하다. 그는 의사로서의 능력뿐만 아니라 병원 운영과 병원 후원금을 받아내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인물로도 유명했다. 30년 가까이 유럽 전역을 돌며, 수많은 단체와 개인 독지가들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매년 수십만 명이 넘는 어린이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하기엔 병원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시간이 갈수록 적자가 늘어나자, 그는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마다 병원 강당에서 자선콘서트를 열기 시작했다. 그는 앙코르와트를 찾은 외국 관광객들을 상대로 직접 첼로 연주를 선보였다. 공연 때만큼은 의사가 아닌 음악인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던 그는, 자신의 이름 비트와 첼로를 합쳐 비토첼로(Beatoceollo)라는 예명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는 관람객들에게 입장료 대신 기부금을 받았다. 이같은 열정 덕분에 어린이병원은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도 현상 유지를 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늘어나는 환자 수를 감당하기 위해 프놈펜에 3곳, 씨엠립에 2곳을 추가로 건립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심과 평생 일군 위대한 업적과는 별개로, 그의 살아생전 성품과 업무 스타일에 대해선 그를 알고 지낸 주변 인물들과 현지 언론들의 평판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실제로 그는 세련되지 못한 말투와 독선적인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그는 정부 관료들은 물론, 세국제기구단체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갖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응급환자를 문밖으로 내쫓은 이유는?
한때 그는 이 나라 국민들로부터 큰 원성을 산 적도 있다. 지난 1997년 왕궁 옆 공원에서 열린 야당집회에서 괴한에 의한 수뢰탄 투척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었는데, 집회에 참석한 15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수십 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중상을 입은 환자들이 리쉬너 박사가 운영하는 어린이병원으로 실려왔고 환자들 중에는 어린이들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문전박대를 당했다. 병원의 총괄 책임자였던 그는 병원에 환자를 수술할 장비가 갖춰지지 않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유를 댔다. 이후 세계보건기구와 유네스코가 이 문제를 거론하자, 그는 적반하장으로 세계보건기구와 유네스코가 세계아동보호헌장을 위반했다며 이들 기구를 기소하기도 했다. 그의 고지식하고 일방적인 업무 스타일은 정부기관은 물론 관계 부처 장관들과도 끊임없는 마찰과 갈등을 빚었다. 그럴 때마다 비트 박사는 늘 자신의 편이 되어준 국왕의 등 뒤에 숨었다. 국왕은 그에게 위기가 닥치거나 궁지에 몰릴 때마다 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감쌌다. 2012년 국왕 서거 후 왕위를 물려받은 현 시하모니 국왕도 그를 보호해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왕실과 유럽 단체들의 든든한 지원과 비호를 받으며 여느 독재자 못지않은 막강한 권력과 강력한 리더십 속에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병원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국왕의 신임 속에 25년만에 돌아온 캄보디아
1947년 스위스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소아과의사로 취리히 어린이병원을 거쳐 1973년 스위스 적십자사 파견으로 캄보디아에 첫발을 디뎠다. 그의 첫 근무지는 칸타보파 병원이었다. 이 병원의 이름은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이 가장 사랑했지만 5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공주의 이름을 따서 만든 어린이병원이었다. 하지만, 2년 후인 1975년 크메르루즈군에 의해 캄보디아가 공산화되자 결국 그도 이 나라를 떠나야만 했다. 그 후 그가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온 건 1991년이다. 무려 25년만의 귀환이었다. 이듬해 그는 시하누크 국왕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그 이듬해인 1992년 11월 병원 문을 다시 열 수 있었다.

그의 첼로 연주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지난 2일 그의 빈소가 차려진 씨엠립 어린이병원을 찾았다. 흑백사진의 리트 박사가 미소를 띤 모습으로 조문객들을 맞고 있었다. 아집과 독선, 괴팍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개인사적 평가는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대신, 그의 헌신과 희생정신만큼은 캄보디아 국민들의 가슴 속에 영원토록 살아남게 될 게 분명하다.
부정부패로 얼룩진 이 나라에서 내부의 온갖 적들과 싸우며 병원을 끝까지 지켜내고 수백만 어린 생명을 구해낼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평생 세상과 타협할 줄 몰랐던 그만의 독선과 아집, 그리고 괴팍하면서도 자기중심적이었던 그의 유별난 성격 때문일지도 모른다.
국화꽃 향기 가득한 그의 빈소에서 발길을 돌리려니, 문득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한번이라도 더 그의 첼로 연주를 들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진한 아쉬움이 묻어난다.
비트 리쉬너 박사를 추모하며… [박정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