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턴’말고 ‘폼페이오’말 들어봐!

비핵화 이행과 보상의 순서에서 미국과 북한에 이견이 존재한다. ‘CVID를 어떻게 실현하느냐’는 북한의 ‘단계적·동시 조치’ 입장과 직결돼 있다. 최근 폼페이오 장관의 신축적 행보가 주목된다.

6월 12일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핵심 의제인 비핵화 방법과 순서 등에서 북·미 양측의 힘겨루기가 본격화됐다. 5월 16일 북한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 미국의 일방적 ‘CVID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 폐기)’ 요구의 부당성을 제기하고 나섰다. 그는 최악의 경우 북·미 정상회담 무산 가능성까지 시사했다. 6자회담의 북측 대표였던 그는 “우리를 구석으로 몰고 가 일방적인 핵 포기만을 강요하려 든다면 우리는 그러한 대화에 더는 흥미를 가지지 않을 것이며 다가오는 조·미 수뇌회담에 응하겠는가를 재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불과 며칠 전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해, 억류된 한국계 미국인 3명을 데려오고 비핵화 타결 시 북한 경제 지원 방안을 내놓았던 미국도 당혹스러운 분위기다. 백악관은 일단 “북·미 정상회담 개최가 여전히 희망적이다”라는 반응을 내놓았다. 내부적으로는 국가안보회의(NSC)를 중심으로 북한의 의도 파악에 분주한 모습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두 차례 만난 폼페이오 장관은 “양측이 정상회담의 궁극적 목표가 뭔지 완전히 일치된 견해”라고 밝혔다. 적어도 CVID라는 목표 자체에 김 위원장도 공감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비핵화 이행(북한)과 보상(미국)의 순서, 즉 ‘시퀀싱(sequencing)’에서는 양측의 이견이 존재한다. 폼페이오 장관이 2차 방북에서 돌아온 직후 “정상회담 전까지 조율해야 할 게 상당히 많다”라고 털어놓은 것도 그 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를 둘러싼 신경전은 이번에 김계관 제1부상이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요구한 리비아식 ‘선 핵 폐기 후 보상’을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표면화됐다.

‘CVID를 어떻게 실현하느냐’ 하는 문제는 북한의 ‘단계적·동시 조치’ 입장과 직결돼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 3월과 5월 두 차례 중국 방문을 통해 시진핑 국가주석에게 북한의 ‘단계적·동시 조치’ 입장을 재확인한 바 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전례로 볼 때 ‘단계별 협상 및 보상’ 방법으로는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더욱이 북측 방안은 시일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어서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내 신속한 비핵화를 원하는 미국 측 의견과 맞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타협점은 제로다. 하지만 양국 지도자의 의지만 있으면 이견 해소가 불가능한 건 아니다. 이와 관련해 온라인 매체 <복스(Vox)>의 5월 12일 자 보도가 흥미롭다. 이 매체는 백악관 사정에 정통한 익명의 전문가 말을 인용해, 미국 비핵화 비전을 이렇게 설명한다. “북한은 우선 미국이 제시하는 ‘일정 시한 내(in a certain timetable) 핵무기 포기’에 합의해야 한다. 그러면 사찰관들이 북한에 들어가 포기 대상을 파악한 뒤 목록을 작성한다. 이 시점에서 북한은 일부 경제제재 해제 같은 첫 보상을 얻는다. 북한이 실제로 일부 핵무기를 제거하면 미국은 다시 그에 상응한 보상을 제공한다. 이어 북한이 핵연료 추출이 가능한 원자로를 폐쇄하면 미국이 또다시 보상을 제공하는 등 비핵화 딜에 따른 북·미 양측의 주고받기가 계속된다.” 북한이 ‘일정 시한’, 즉 ‘트럼프 임기 내 비핵화 시간표’에 합의한다면, CVID 이전에도 비핵화 개시와 함께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 비핵화의 첫 대상은‘ICBM 핵탄두’가능성
흥미로운 점은 최근 2차 방북 이후 폼페이오 장관이 보여준 신축적 행보다. 그는 귀국 직후인 5월 11일 ABC 방송 인터뷰에서 미국의 기존 입장인 ‘선 비핵화 후 보상’ 에 관해 “향후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지켜보자”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특히 5월 13일 <폭스뉴스>에서는 “북한이 로스앤젤레스나 덴버 혹은 워싱턴까지 핵탄두를 날려 보내지 못하도록 하는 게 우리의 목표다”라고 말했다. 그의 발언대로라면,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 전체가 아니라 본토에 대한 직접적 위협인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이 제거되면 CVID 실현 전이라도 제재 해제에 들어갈 수 있음을 내비친 셈이다. 그 경우 비핵화 시작의 첫 대상은 조속한 제거, 반출 및 폐기가 가능한 ICBM 핵탄두가 될 가능성이 있다.

안보 전문가인 이보 달더 전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주재 미국 대사는 자신의 트위터에 “폼페이오 발언을 보면 대북 협상의 최종 국면은 미국에 대한 핵 위협 제거인데, 이는 CVID와 같지 않다”라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는 5월 14일 자에서 “폼페이오가 기존 핵 프로그램 중단과 ICBM 제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라고 전했다. 즉 폼페이오가 북·미 정상회담 성취 목표와 관련해 북한과 우선 타협 가능한 쪽으로 골대를 이동시켰을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 윤곽은 정상회담 의제와 관련해 현재 한창 물밑 진행 중인 양측의 협상 결과에 따라 조만간 드러날 전망이다.
[시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