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찾은 4전 5기 신화 주인공 홍수환

산업근대화가 한창이던 지난 70년대 박치기왕 김일로 대변되는 프로레슬링과 더불어 우리 국민들을 열광케 했던 양대 스포츠가 있었으니, 바로 프로복싱이다. 흑백TV도 몇 집 없던 가난한 시절, 생중계는 커녕 AM 고물 라디오로 듣거나, 위성녹화방송을 보며 우리 국민들은 권투경기에 열광하며, 희망과 용기를 품었다.

70년대 세계권투를 풍미한 최고의 권투 영웅을 꼽으라면, 단연 홍수환 선수(50전 41승 14KO)다. 그는 한국선수 최초로 두 체급 세계 챔피온 벨트를 거머쥔 링 위의 살아있는 전설로도 통한다. 특히, 50대 이상 장년층에게는 지난 1977년 남미 파나마에서 열린 홍수환선수의 경기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추억으로 다가온다.

42년 전 일이다. 홍수환과 그보다 10살이나 어린 젊은 복서 카라스키야는 파나마의 링 위에서 WBA주니어페더급(55.34㎏) 초대 타이틀을 걸고 맞붙었다. 전국의 시청자들은 기대와 흥분 속에 이 경기를 보기 위해 TV 앞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11전 11승 11KO 전승을 기록 중인 챔피언 헥토르 까리이스키의 매서운 주먹에 홍수환이 2라운드에 무려 4차례나 다운을 빼앗기는 안타까운 순간을 지켜봐야만 했다. 이미 끝났다고 판단해 ‘에이~’ 하며, 등을 돌리는 시청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3라운드에서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정신을 차린 홍수환 선수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벨소리와 함께 덤벼들어 상대에게 사정없이 강펀치를 날리기 시작했다. 회심의 ‘레프트훅’이 상대의 관자놀이에 명중한 순간 카라스키야의 두 다리가 허공으로 떴다. 로프에 기대 엉거주춤한 그로키 상태의 상대를 마지막 순간까지 몰아붙힌 홍 선수는 3라운드 48초 만에 넘사벽 상대를 눕히고 말았다.

그가 링 위에서 두 팔을 뻗은 채 포효하는 순간, 대한민국은 뒤집어졌다. 이 한방으로 한국 프로복싱 사상 처음으로 두 체급 세계 정복에 성공한 홍수환은 일약 국민 영웅이 됐고, 4전5기 신화는 그렇게 해서 탄생하게 됐다.

이 경기에 앞서 홍수환은 1974년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세계복싱협회(WBA) 밴텀급 타이틀전 챔피언 아놀드 테일러와의 경기에서 네 차례 다운을 뺏으며 우세한 경기를 펼친 끝에 15회 판정승으로 승리를 따낸 적이 있다.

당시 홍수환은 어머니와 국제전화 통화에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외쳤고, 이에 홍수환의 어머니는 “장하다. 대한국민 만세다!”라고 흥분된 목소리로 화답, 세간에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그가 챔피온 벨트를 매고 금의환향하던 날, 전국 곳곳에는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문구가 쓰인 현수막이 나붙었고, 김포공항부터 서울광화문 도심으로 이어지는 카퍼레이드가 펼쳐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아파트 두 채를 살 수 있는 거액 200만원을 하사한 소식이 뒤늦게 알려져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어릴 적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과 더불어 삶에 희망과 용기를 심어준 주인공이 지난 8일 밤 캄보디아를 찾았다. 자정 가까운 늦은 시각, 프놈펜국제공항 입국장을 나선 그의 얼굴에선 나이를 속일 수는 없어 주름이 지고, 가발을 쓴 티마저 났다. 하지만, 왕년 세계최고 권투선수답게 호탕한 웃음속에도 날카로운 눈매와 강단있는 목소리는 여전했다. 평생 그의 이름 뒤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던 ‘선수’라는 호칭 대신, 그의 이름 석자 뒤에는 기독교 ‘장로’라는 직함이 붙어있었다. 그는 현재 한국권투위원회 회장이기도 하다.

4전 5기의 신화 홍수환씨는 13일 새벽 수도 프놈펜에서 차로 1시간 떨어진 우동 작은 시골마을 빠리마코 문산영광교회 등을 찾아 현지 마을주민들과 어린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학용품과 간식을 제공한데 이어, 같은 날 오전 프놈펜한인교회(담임목사 서병도)에서 초청간증기도에 참석했다. 조용현 장로의 기도예배에 이어 뜨거운 박수 속에 그가 단상에 오르자, 화려한 전성시대를 기억하는 50대 이상 중장년층 교민 참석자들의 눈빛은 감회에 젖어들었다.

“1974년 멀고 먼 남아공에 가서 아놀드 테일러라는 선수와 맞붙었죠. 그때 그 선수가 새로운 세계챔피언이 돼서 가장 만만한 상대를 고른 게 바로 저였어요. 알지도 못하는 ‘코리아’라는 작은 나라에 세계 랭킹 2위에 올라있으니까 데려와서 1차 방어전을 쉽게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죠”

간증기도에 나선 홍수환씨가 과거 승승장구했던 선수시절을 회상하며 하나 둘 이야기를 풀어나가자, 참석자들은 향수에 젖었다. 그는 자신의 친동생이자 가수로 성공했다가, 지금은 목사가 된 홍수철에 관한 이야기부터 권투보다 힘들던 자신의 인생교훈담까지 적절한 유머와 위트까지 섞어 털어 놓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까라이스키는 나한테 질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름이 ‘까라~ 이스키’라는 이름 때문이다”

좌중에선 웃음보가 터졌다.

초청간증기도를 성공적으로 마친 홍수환씨는 꽃다발과 큰 박수를 받으며 단상을 내려와 교민 팬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는 것으로 캄보디아방문을 마무리했다.

전 세계챔피언 홍수환씨의 이번 캄보디아 방문은 박현옥 한인회장의 주선으로 성사됐다. 박 회장은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위기와 시련을 딛고 경기를 이긴 홍 선수처럼 우리교민사회가 더욱 용기를 갖길 바라는 마음에 오래전부터 개인적 친분을 쌓아온 홍수환 선수를 모시게 됐다”고 초청 이유를 밝혔다. 한인회측은 지난해 초에도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장경동 목사(대전 중문교회 담임)를 초청, 동 교회에서 초청강연회를 가진 바 있다. [박정연 기자]